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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회 그리고 역사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소수의견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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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서 중국에 관한 글을 이리저리 찾아보면서 쓰고 있는데, 어째 희대의 뻘짓인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이 안끼는 데가 없는 것을 보고 한번은 설명하고 넘어 가야 겠다 싶었다. 단순히 급진사회주의운동으로 알기에는 이 일로 인해서 끼친 영향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 중국의 주석인 시진핑도 문화대혁명때 변방으로 쫒겨나고, 누나는 홍위병의 괴롭힘을 못이기고 자살했다.

 

 

 

바로 앞에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고
 

1959년 당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당/정/군의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퇴하고

 

 

 

류사오치가 후대 주석에 오르며 덩샤오핑과 실용주의 노선을 타며 마오쩌둥을 과감없이 비판한다.

 

그리고 이 실용주의가 인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며, 마오쩌둥에 대한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자

 

이것에 대한 불만과, 대약진운동을 하는 과정에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지적에 열이 받은 나머지

 

2차전을 터트리는데 바로 문화 대혁명이다.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줄여서 문화대혁명 또는 한자권에서는 문혁이라고 칭한다.

 

無産階級文化大革命/无产阶级文化大革命

 

The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GPCR)

 

의외로 문화대혁명의 시작은 엉뚱한 방향에서 화약고가 되어 터지는데

 

 

해서파관(海瑞罷官)과 조반유리(造反有理 사건 때문이다.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연극 때문이다.

 

이 연극은 명나라를 배경으로

 

'해서'라는 청백리 관리가 폭군 황제인 가정제에게 직언을하다가 파직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그럭저럭 잘만든 연극이고, 마오쩌둥은 연극이전에 '해서'라는 인물은 존경하며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연극도 마음에 들었고, 연극 제작 의뢰자 역시 자신이었다. 

 

 

그런데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야오원위안이 1965년 '문회보'라는 신문에 '마오쩌둥을 까는 연극'이라는 칼럼을 실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해서는 펑더화이이고 폭군은 마오쩌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해서파관 사건이다.

 

이 연극은 베이징 부시장이 만들었는데, 자신에게 유탄이 날라올것을 직감한 베이징 시장 펑전은 해명에 나섰으나

 

이미 마어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 장칭, 야오원위안등 수많은 선전매체를 통해서 맹공을 퍼부었고

 

마오쩌둥 역시 전면에 나서며 직접 비판을 했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고 있는 홍위병들

 

 

결과적으로 이런 과정에 10~20대로 이루어진 홍위병들을 대거 선전 선동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와 정치를 뒤엎자는 편지를 마오쩌둥에 보내게 되었고 이를 조반유리(造反有理)라고 한다.

 

 

 

 

"천하무적의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에 가득하다 - 조반유리"

 

마오는 젊은이들의 지지를 확인하면서 흡족해 했고,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발표를 한다.

 

그리고 8월 8일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 - 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다.

 

겉으로는 제국, 우파를 척결하자는 내용이지만,

 

사실상 실용정책을 추구하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전면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시작한다.

 

 

1966년 8월 8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关于无产阶级文化大革命的决[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  라는 이름의 16개항을 발표한다.

 

16개조의 내용은 쉽게 말해서 마오쩌둥이 하자는게 진리라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는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홍위병이 깽판칠 자유만을 의미한다.

 

 

 

같은해 8월 베이징 8월 폭풍 이 일어나게 되고 본격적인 홍위병들의 대학살극이 시작한다.

 

8월 13일 베이징 체육장에서 수만명의 홍위병이 집결한 가운데 군중 집회가 열린다.

 

홍위병은 5명의 민간인을 임의로 체포하여 홍위병을 위협한 죄로, 구타와 고문을 했다.

 

이어 베이징 제 101중학교에서 홍위병들이 10여명의 교사들을 체포하여 달군 석탄위를 기어다니게하고

 

베이징 6중학교에서는 취조실을 설치하고 사람들을 고문하고 희생자 피를 가지고 <적색 테러만세!>라는 구호를 적는다.

 

그 누구도 이러한 비이성적인 광기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홍위병에 무제한적인 자유를 부여한 마오쩌둥 덕분에, 거리낌없이 할개를 치고 다니고

 

마음껏 다 박살내고 다닌다.

 

절, 사당, 성은 모조리 문을 닫거나 약탈을 당했고,

 

지식인들은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며 조리돌림과 구타 살해를 당한다. 

 

합법적인 권력을 가진 공안조차 어쩌지 못했으며 당시 공안 수장인 셰푸츠는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이 와중에 마오쩌둥 왈 :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 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마오쩌둥을 비판했던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 연금상태가 된다.

 

물론 덩샤오핑도 당직에서 쫒겨나고, 지방의 트랙터 엔진공장에서 일을 한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을 건들이지 말고 하고 싶은거 하게 냅두었으며

 

마오쩌둥은 숙식걱정하지 마라 정부가 다 대준다며, 국가 재정으로 사병들을 먹이고 재운셈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튼 홍위병은 열심히 때려 부셨다.

 

삼국지에서 나오는 역사적인 장소부터, 공자, 불교 사찰 모든 오래된 것은 청산의 대상이었으며,

 

궁중요리법도 피하지 못하고 불태워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중에 가서는 홍위병이 중화기로 무장하고 서로 파가 나누어져 싸우는등 희안한 모습을 연출하다

 

인민해방군 군대가 출동해서 진압하기도 한다.

 

아무튼 1968년이 되자 마오쩌둥은 더이상 자신의 정적이 없어지고, 자신은 신격화가 되었다.

 

사냥이 끝나면 개를 잡아 먹는다는 말처럼, 홍위병이 더이상 필요가 없어진것이다.

 

마오쩌둥은 다시 인민해방군이 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하며 홍위병을 때려 잡고, 농촌으로 보내서 사실상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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