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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회 그리고 역사

대륙의 주인은 누구인가? 국공내전을 알아보자

by 소수의견 2022.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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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쑨원이 주도한 중국 동맹회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게 된다.
(신해혁명)


쑨원은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이었으나

신해혁명 때, 청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하여

청나라의 실권자인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직을 양보하여 그를 포섭한다.

 

 

쑨원

 

 

 

 

위안스카이는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청나라를 버리고,

 

쑨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꾼 후,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군주제에 환멸을 느끼던 중국 인민들은 위안스카이에 대해 반발했고,

 

위안스카이는 결국 제위를 포기하였으며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중국에는 각기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벌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에 쑨원은 중국 대륙을 완전히 접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21년, 쑨원은 신생국인 소련(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소련은 이에 흔쾌히 응하게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소련은 교류를 하게 되고,

 

국민당은 소련제 무기, 소련의 전투 방식을 습득하게 된다.

더 나아가 쑨원의 국민당 정부는 새로 생겨난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서는

 

중국 내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을 준비한다.

 
 

 

하지만 1925년,

 

국민당의 쑨원이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인 장제스(장개석)이 국민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촉한의 제갈량이 사망하자 강유가 그의 유지를 이어 북벌을 감행한 것처럼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를 이어 받아 공산당과 연합하여 북벌을 감행하게 된다. (제1차 국공합작)

 

 

 

 

그런데 북벌을 하던 중인 1926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북벌에서 중국 영토의 50~60%를 장악한 장제스는 생각하기를,

'이제는 공산당의 도움 없이 우리 국민당의 힘만으로도 북벌을 완수할 수 있다...'

고 하면서 사건 하나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공산당원이 광저우에 있는 중산함(함선)에 거짓으로 명령을 내려, 황푸로 회항하게 했다."

"도저히 공산당원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국민당은 공산당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지는 못 했고,

 

 

 

 

중국 국민당의 주석인 왕자오밍이 장제스의 조작 사건에 반발하여 국민당을 떠나는 것으로 중산함 사건은 종결된다.

하지만, 장제스는 아쉬웠다.

공산당 세력을 축출할 좋은 빌미를 찾고 있는데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1927년, 장제스는 상하이에 입성하게 되었는데

상하이의 상공인, 부유층 세력이 장제스에게 말하기를,

"국민당은 자본주의 정당입니다. 어떻게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국민당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함.

이에 장제스는 이 말을 옳게 여기고 1927년 4월 12일, 공산당 세력을 죄다 때려잡는 사건을 만든다.

 

 

 

 

4.12 사건으로 공산당은 우두머리격인 천두슈, 리다자오가 죽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공산당 세력은 큰 충격을 받았고, 장제스는 4.12사건을 계기로 하여 공산당 세력 소탕에 나선다.

 

 

 

 

이에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공산당 세력을 이끌고, 이른바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후퇴를 감행하게 된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은 처음 떠날 때 84,000여명이었으나

12,000km의 거리를 순전히 걸음으로 움직였고, 옌안에 도착했을 때는 살아남은 수가 8,000여명뿐이었다.

(1935년 10월 22일)

 

 

중국 국민당에 장쉐량(장학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래, 장제스와 대치하던 군벌인 장작림의 아들이었지만,

일본이 음모를 꾸며 장작림을 죽이자, 아버지의 세력을 이끌고 국민당에 투항하였고,

그 때는 옌안에서 대치중이던 공산당 세력의 토벌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35년은 중일전쟁이 한창 전개돼던 중이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일본을 상대하기보다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장쉐량 이러한 장제스의 전략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장쉐량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일본이 우리를 침공하고 있는데, 총통은 외세를 물리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손을 써야 한다...'

라고 생각하고서는 일종의 쿠데타를 준비한다.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는 장쉐량이 주둔하고 있는 시안에 위로차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장쉐량은 온천에서 한가로이 목욕을 하고 있던 장제스를 긴급 체포하고, 옥에 가두어 버린다.

장제스가 놀라 장쉐량에게

"자네 미쳤나? 상관을 가두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총통, 우리는 지금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일본이 중국 대륙을 삼키고나면 국민당이고 공산당이고 아무 것도 없어요!"

라고 주장하면서 결국에는 장제스를 설득하게 된다.

이에 1937년, 국민당은 불법으로 규정하던 공산당을 승인하고 공산당 정치범을 해방하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다시 한번 국민당과 공산당은 연합하게 된다. (제2차 국공 합작)

 

 

 

하지만, 장개석의 국민당군 일본군과 10번 싸웠다 하면 8, 9번은 지는 군대였다.

국민당군이지만 독일군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히틀러 독일이 중국에 보낸 군사고문 팔켄하우젠말 따라서 장제스가 육성한 일부 유럽식 병사들이다.

 

이 8만명이나 되는 정예부대를 팔켄하우젠은 아껴써야한다고 했지만 장제스는 막쓰다가 망했다.

 

 

 

 

이에 반해, 마오쩌둥의 공산군은 농촌, 산촌을 토대로 게릴라 활동을 펼치며

농민들, 화전민들을 포섭했고 그들을 공산당의 군인으로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공산군은 농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농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고 있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하였고, 전쟁은 끝났다.

 

 

 

 

1945년 8월~10월 두 달간, 마오쩌둥 장제스는 충칭에서 회담을 가졌고

'전쟁 없이 평화적인 정부를 세우자는 합의' 를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국민당은 일방적으로 성명을 번복했고, 공산당은 이에 반발한다.

이에, 장제스는 군사를 이끌고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을 몰아내고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제2차 국공내전)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국민당군에게 우세한 듯이 보였다.

옛 나치 독일의 무기,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 등으로 무장하였고

수 또한 처음에는 430만에 이르는 대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크게 실수를 하게 되는데

점령지에 일부 병력을 주둔시켜 수호하지 않고,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진격하는데에만 신경을 쓴 것이었다.

 

 

 

 

장제스가 점령한 지역은 얼마 안 있다가 공산군에게 재탈환되는 등 혼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중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공산군을 지지하였다.

국민당군은 430만명 --> 365만명 --> 149만명으로 날이 갈 수록 병력의 수가 감소했으나

공산당군은 120만명 --> 280만명 --> 400만명으로 날이 갈 수록 병력의 수가 증가하였다.

결국,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은 패배하였고, 장제스는 패잔병을 이끌고 타이완(대만)으로 도망쳤다.

 

여기서 초창기에 국민당군 병력이 400만을 넘겼던 것은, 군벌 동맹의 병사도 포함한것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군벌이 공산당에 항복을 하고 공산당으로 전향하였기에 급격한 병력차이가 나타난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중국 대륙은 공산화되었다.

1950년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구는 5억여명

중화민국(타이완)의 인구는 800만여명이었다.

 

 

 

 

시안 사건으로 장제스를 가두었고 국공합작을 주장한 장쉐량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망칠 때 강제로 끌고 갔으며

1991년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1995년, 미국으로 떠나 2001년 하와이에서 사망하였다.

 

 

미국 대통령인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여 핑퐁외교를 전개하기 전까지,

타이완은 UN에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 본토에 비해 경제 성장을 거듭하였고

국제적으로 정식적인 중국의 지배자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으며

얼마 안 가 중화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하자, 대만은 UN을 탈퇴하였으며

대만의 UN 상임이사국 자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계승하게 되었다.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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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대만을 국가로 인정한 국가들은

부르키나파소, 감비아, 상투메프린시페, 스와질랜드 (아프리카)

바티칸 시국 (유럽)

키리바시, 마셜 제도, 나우루, 팔라우, 솔로몬 제도, 투발루 (오세아니아)

벨리즈,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아이티, 세인트키츠 네비스,

온두라스, 니카라과, 파나마, 파라과이,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중남미)

위 목록 국가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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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 요약

1. 국민당군은 무기도 좋고 군사 수도 많았다.

2. 그런데 무기도 나쁘고 군사 수도 적은 공산당군에 패해서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3. 중화인민공화국이 성장한 이후에, 타이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공산당이 몰락을 했다면 625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통일 한국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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