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박정희3

유신헌법, 체제는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이끌 었을까? 흔히 유신을 가지고 초법적인 대통령의 제왕, 독재의 시발점으로 이야기할뿐, 압도적인 국민투표로 이루어진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 투표가 조작이 아닐까? 라고 한다면 아무도 조작이라고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작없이 국민의 압도적으로 표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책임소재가 불문명해질뿐더러 민주주의에 대한 애매모호함이 남기 때문이다. 마치 나치와 파시즘 처럼 말이다. 뭐 아무튼 궁금한것은 그렇게 정치적 반대가 많았는데도 국민이 어떻게 유신헙법을 91%라는 찬성으로 통과 시켜주었는가? 단순히 독재적 공포라고 시민들을 굴복하였다는 것역시 설명하지 못하는것이 많다. 박정희의 연임을 가능하게한 69년도 3선개헌 투표에서는 총유권자의 77.1%이 참여해 65.1%만이 찬성을 하였고 71년 4월 대선에서는 .. 2022. 5. 23.
1969년 10월 10일 박정희 대국민 담화문 내가 해 온 모든 일에 대해서, 지금까지 야당은 반대만 해왔던 것입니다. 나는 진정 오늘까지 야당으로부터 한마디의 지지나 격려도 받아보지 못한 채, 오로지 극한적 반대 속에서 막중한 국정을 이끌어왔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고 하여, 나는 야당으로부터 매국노라는 욕을 들었으며 월남에 국군을 파병한다고 하여, "젊은 이의 피를 판다"고 그들은 악담을 하였습니다. 없는 나라에서 남의 돈이라도 빌려 와서 경제건설을 서둘러 보겠다는 나의 노력에 대하여 그들은 "차관 망국"이라고 비난하였으며, 향토예비군을 창설한다고 하여, 그들은 국토방위를 "정치적 이용을 꾀한다"고 모함, 국토의 대동맥을 뚫는 고속도로 건설을 그들은 "국토의 해체"라고 하였습니다. 반대하여온 것 등등 대소사를 막론하고 내가 하는 모든 .. 2022. 5. 14.
박정희 군사정권과 독립투사의 발견 60년대 당시엔 누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역사책, 교과서에도 없었고 대다수 국민들이 잘 알지 못했으며 인정또한 받지 못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로 독립운동가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정확히 1961년 516군사혁명 이후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전 대통령의 사임 발표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권한대행을 물려받으며,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이었다. 이 분들 외에도 그 해에만 약 7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한다. 안중근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창호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유관순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이봉창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윤봉길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김구 - 196.. 2022. 5. 1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