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개인적인 에세이

중국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소수의견 2022. 5. 22.
반응형

어제 쓴 글인 캄보디아의 시궁창 근현대사에서 연관되는 내용이니

 

먼저 보고와도 이 글을 보는데 약간은 이해가 될것이다.

 

캄보디아의 시궁창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캄보디아의 시궁창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얼마전에 동남아를 쭉 다녀오면서 캄보디아도 가게 됬는데 박물관에서의 찬란한 역사와는 반대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아이노인 할거없이 길거리에 구걸하는 거지가 넘쳐나고, 쓰레기 처리가

think-of-minority.tistory.com

 

미국하고 중국이 수교를 맺은뒤에 중국-베트남 전쟁이 시작 되었는데 연표를 정리 하자면

 

 

1978년 12월 : 베트남 캄보디아 침공(1달만에 점령함)

 

1979년 01월 : 미국-중국 수교

 

1979년 02월 : 중국-베트남 전쟁 시작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두달 뒤에 벌어진 중국 -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같은 소련 - 미국처럼 냉전관계도 아니고 같은 사회공산권 나라들이 치고 박고 싸운게 이해가 안될 수가 있는데

 

캄보디아는 중국편이었고, 베트남은 소련편이다.

 

일단 중국과 베트남 전쟁의 원인은 몇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1.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천년 넘게 받을 정도로 일방적인 관계였으며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을 상당히 싫어한다.

 

2. 베트남이 공산화가 되면서 많은 화교가 죽거나 재산을 빼앗겼다. (보트피플 상당수가 화교였다.)

 

3. 친중정권인 폴포트,크메루르즈를 베트남이 침공하고 괴뢰정권을 세운것이 중국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서 중국은 대내외적으로는 캄보디아의 해방을 내세우며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중국 - 베트남 전쟁은 일어난다.

 

 

 

그런데 중국의 상황이 영 좋지 못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극좌사회주의운동으로

 

중국은 셀프 자해를 하였고, 맛이 간 상황인데 3년만에 복구될리가 없다.

 

공산당-국민당 시절과 6.25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군인들은 문화대혁명으로 날라가 버린지 오래였고

 

군사장비, 전술조차 발달하지 못했다.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마오쩌둥과 대약진운동에 대해서 알아보자

 

 

 

 

 

 

반면에 베트남군은 미국과 싸워서도 패하지 않았던 백전 노장이다.

 

여러 전투로 실전감각을 익힌 베트남군은 중국군은 베트남군에게 처참하게 농락당한다.

 

 

PPSh-41를 든 베트남군 여자 민병대. 

 

 

그것도 민병대, 국경수비대에 말이다.

 

베트남 본군은 캄보디아를 침공한다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중국-베트남 국경에는 민병대와 국경수비대 밖에 없었다.

 

베트남-중국 국경에서 캄보디아와의 거리는 1000KM 였고, 중국은 비어있는 기지를 처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으니

 

하노이까지 금방이라고 큰소리 쳤지만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 지형으로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문화대혁명으로 너프 먹은 중국군, 미국과 실전을 치르며 베테랑이된 베트남군

 

장비 면에서도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지체되어 625전쟁 당시 수준으로 머무를때,

 

베트남군은 미군이 남기고간 장비를 사용하고 다녔다.

 

 

 

 

중국군은 예비군을 포함하여 총 20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100여 기의 항공기, 59식 전차, 62식 전차, 63식 전차 등  400여 대의 전차 및 63식 장갑차 등의 기갑전력을 투입

 

 

베트남군은 예비로 남겨졌던 소수의 국경수비대와 민병을 규합, 최종적으로 18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40여 대의항공기와 소련제 T-34/85 전차, 미국산 M113 장갑차, 중국산 63식 장갑차 등 소수의 기갑차량이 동원되었다.

 

 

 

 

 

중국군은 베트남 북부 정글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인해전술에 전략을 구사하였으나,

 

베트남군은 진지에는 베트콩 출신들을 배치하고 각종 부비트랩들을 설치했으며 또한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거기에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을 활용하여 개전 초기 24시간만에 중국의 63식 경전차를 13대나 격파했고

 

또한 초기에 15대나 되는 중국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중국이 처음에 호언장담 했던 것과는 달리 진군이 늦어지고 피해가 막심했다.

 

정규군이 민병대와 전투한다는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졸전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졸전을 치르던 중국이지만 쪽수에 장사없다고, 베트남 방어선을 꾸역꾸역 돌파하면서

 

3월 6일 국경에서 40 km 정도 떨어진 요충지인 랑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랑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철군하는걸로

 

베트남-중국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전쟁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몇가지 있는데

 

1. 친소련이었던 베트남을 공격하는것을 뒤에 소련이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이미 전에 소련-중국 국경분쟁으로 붙어본 적이 있던 중국은 소련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감당 못할것을 안다.

 

2. 문화대혁명으로 맛이 간 중국은 장기전을 할 여력이 없었다.

 

3.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있던 베트남군을 북부 국경지대로 다시 불러들이는것이 목적이었지만

 

   정규군이 돌아오기는 커녕 민병대 상대로 농락당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과장되게 홍보하는 경향이 있어서 정확한 사망자 집계는 불가능하지만 대충 가늠해본다면

 

중국군 사망자는 많게는 2만 6천명까지 추산하고

 

베트남군은 민간인까지 합해서 3만명으로 추정한다.

 

다른 자료들도 중국과 베트남의 희생이 비슷하거나 베트남이 약간 더 많은 정도로 나오는데

 

베트남은 비정규군이었고, 중국이 동원한 군대의 규모가 큰것을 감안하면, 중국이 사실상 패했다고 보는게 맞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것과는 별개로 80년대 내내 베트남-중국 소규모 고지전과 충돌이 있었으며

 

 

1988년 : 중국-베트남 평화협정시작

 

1989년 :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 철군

 

1991년 : 중국-베트남 수교

 

1999년 : 중국-베트남 간 육지 국경선을 획정하는 국경 협정이 체결

 

 

88년 평화협정 시작 후에도 소규모 충돌이 있다가 수교이후로 완전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참고로 북한은이때 중국 편을 들어서 베트남과 북한은 지금도 사이가 안좋다.

 

 

 

시간이 자나서 2011년 5월 난사군도의 해저가스 개발과 관련해서 중국과 베트남 분쟁이 다시 발생한다.

 

베트남 자원조사선이 난사군도에서 작업도중 중국 해양 순시선의 방해로 해양 케이블이 끊기는 사고가 발생했다.

 

물론 가만히 있을 베트남이 아니었는데

 

6월 21일 전쟁에 대비한 전시동원령에 총리가 서명을 하였고,

 

베트남은 중국에다가 베트남 항구에 미국 항공모함의 기항을 허가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중국이 물러선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