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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에세이

베트남 전쟁과 근현대사를 알아보자 1편

by 소수의견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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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나 국제적인 정세를 보면 어느 한가지가 단독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유럽이 전 세계에 끼친 영향(해악)은 사실 말로 할 수 없다. 아프리카를 땅따먹기 하듯이 줄로 그어버린 것이 오늘날 내전의 원인이 되었고, 동남아의 경우 90년대 후반까지 내전으로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도 어떻게 보면 열강의 식민지배로 나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공산권과 자유민주주의 권의 이념 대립이 맞물려서 혼종을 만들어 냈다고 보면 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본글은 인도차이나 식민지 - 제1차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을 모두 다루기 때문에 글이 깁니다. (많이)

 

 

 

일단 먼저 이 사진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지역

 

한 마디로 프랑스의 식민지다. 통킨과 아남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오늘날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원래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나누어 져있었다. 우리가 알던 베트남 전쟁당시 월남월맹보다도 오래된 개념이다.

 

18세기 중엽 북쪽은 여씨가, 남쪽은 완씨가 세력을 키워 서로 싸우고는 하다가

 

베트남 마지막 왕조였던 응우옌 왕조는 쩐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울 때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인도를 식민지 삼기 위해서 싸우다가 영국에게 패하고 다른 식민지를 찾던 중이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을때 응우옌 왕조는 원조를 약속 받았으나, 프랑스는 원조를 빌미로 점점 더 큰것을 요구하자

 

응우옌 왕조는 새 왕조를 세운 뒤 배외 정책을 폈고,

 

2대 황제였던 민망(Minh Mạng)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의 선교를 금지하고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일은 비엣민(월맹)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후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고 일본은 1942년에 대동아공영을 주장하며 동남아에 있던 연합군 세력을 몰아내고

 

동남아를 일본의 식민지로 삼게 된다.

 

다만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인들을 쫒아내지 않고 프랑스 총독부는 그대로 두게 된다.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을 했지만, 현지 사정에 밝은 편이 아니었고, 조선처럼 원주민의 친화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총독부가 일본말만 잘 듣는다면, 자원을 빨아내는 것에 대해서 윈-윈 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프랑스는 독일때문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때였다.

 

 

그래서 일본은 베트남 현지 사정에 밝은 프랑스 관리들을 포섭해서 1944년까지 대략 3년간 총독부를 부려먹는다.

 

 

 

 

캄보디아도 바로 독립을 하지 못하고 프랑스령으로 들어간것처럼

*2019/01/17 - [글쟁이의 낙서장/어지러운 국제 사회 야야기] - 캄보디아의 시궁창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베트남역시 일본군이 주둔하고는 있었으나, 프랑스의 통치를 사실상 묵인한 상태이기 때문에

 

일본이 패망했지, 프랑스가 망한거는 아니어서

 

다시 프랑스는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해서 주둔을 하게된다.

 

 

 

어라? 그런데 일본이 퇴각하면서 무기들을 대부분 베트남에 그대로 버려두고 갔고

 

지방의 명문 호족 군벌 세력들이 이 무기를 이용해서 무장을 해두었고

 

프랑스는 베트남의 무장해제를 위해서 영국과 중국에게 베트남에 군대를 주둔 할 것을 요청한다.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북쪽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남쪽은 영국의 로열아미가 각각 군대를 주둔하게 된다.

 

물론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모택동의 공산당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 신경을 거의 쓰지 못했고

 

명목뿐인 군대였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 베트남 독립 선언의 서문, 호찌민 -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

 

 

이때 호치민이 나서서 북부지방의 호족 군벌 세력을 통합해서 북베트남을 빠르게 안정화 시키고 공산주의를 선언한다.

 

즉, 스탈린과 마오쩌둥편을 든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엣민, 월맹(Viet Minh/ 越盟)이다.

 

아무튼 베트남은 이렇게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 남베트남이 갈라지게 된다.

 

 

영국도 군대를 주둔시키기는 했는데, 버마(미얀마)하고 인도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를 빼버리게 된다.

 

북쪽은 호치민이 장악을 했는데, 남쪽은 프랑스가 모두 관리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장고끝에 악수른 둔것처럼, 커져가는 월맹의 압박에 프랑스는 고민을 하다가 월맹의 거점 도시였던

 

항구도시 하이퐁에 포격을 가하고 군대를 투입시켜 버린다.

 

이 사건으로 실질적으로 2차세계대전의 진화를 겪지 못했던 베트남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고

 

지금 당장은 체계가 잡지못한 월맹군은 하노이를 포기하고 산악지대로 가서 게릴라 전을 한다.

 

 

 

하이퐁 부두 사진

 

당시 1949년도에 일어난 일이라, 우리도 그렇고 국제사회는 큰 관심이 없었다.

 

미국-중국-소련 모두 한반도만 보고 있던 때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벌어진 전쟁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른다.

 

 

 

프랑스는 3년 동안 비엣민의 게릴라 부대와 충돌하였는데,

 

비엣민은 선전과 테러를 동원하여 코친차이나와 통킹의 광대한 농촌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비엣민은 1950년부터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통킹 만 북쪽에서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프랑스계 베트남인으로 구성된 병력을 강화하고

한국 전쟁에서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인식한 미국의 도움을 받아 2년 동안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전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디엔비엔푸는 대부분이 산악지형으로 베트남에서 공중을 이용한 물자조달을 가능하게 하는 프랑스군의 핵심시설이다.

 

즉 활주로가 있었다는 곳이다. 철의 요새라고 불리는 디엔비엔푸 이곳이 없으면 프랑스군은 작전 수립자체가 안되는 요충지다.

 

그리고 월맹군역시 이곳을 함락해야한 전쟁의 싱기를 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군의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군대조직에 맞서 북베트남은 철저하게 게릴라전으로 맞섰고

 

이런 히트앤런에 프랑스군은 피로도가 극심하게 쌓였다.

 

 

프랑스군 지휘관 나바르는 일일이 게릴라군을 잡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이 게릴라들을 모조리 끌어내서 한방으로 끝낸다는 계획을 세운다.

 

 

 

최고 중요 시설이면서도 고립지형인 디엔비엔푸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기 시작한다.

 

월맹이 반드시 이곳을 탈취해야하니 자기네 모든 병력과 물자를 한곳에 넣고 공격해 오는 월맹군을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림으로 보는것처럼 방어만 하면서 몰려드는 월맹군을 잡는다는 개념이다.

 

다만 나바르장군은 당연히 이길것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이외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았다.

 

아무튼 프랑스군은 최정예 부대1만5천명을 요새에 배치하고 게릴라들과 일전을 준비한다.

 

근데 문제는 날씨다.

 

베트남은 위아래로 긴 형태의 나라이고 전쟁터는 열대몬순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무슨 뜻이나면 10월에서 3월의 건기에는 날씨가 좋은데

 

4월부터 9월까지 우기는 1500mm의 폭우가 쏟아지는 곳이라는 거다.

 

 

물자의 보급은 드랍쉽으로 하면 되겠지~ 하고 넘어갔는데

 

악천후 때문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 했으며, 설령 접근하더라도 월맹군의 대공포 때문에 목표 지점까지 운반을 못하고

 

월맹군이 중간에 화물을 가로채는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다.

 

거기에 월맹군은 소총 몇자루 정도로 무장했겠거니 하고 과소평가 했는데

 

정규군급 무장과 잘 계획된 전술로 수시간만에 프랑스군 진지를 하나 날려버리기도 하고

 

프랑스는 전투기를 동원한 폭격을 요청했으나, 월맹이 정글에 짱박아둔 대공포에 찢겼다.

 

 

* 미국의 CIA가 1946년까지 월맹을 지원했다는게 밝혀지지만 넘어가자

 

 

프랑스가 얼마나 월맹을 만만하게 봤으면 작전계획에 포격조차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월맹군은 반대편 고지에 포를 끌고와서 프랑스 진지를 무차별적으로 두둘기자

 

그제서야 포를 꺼내서 대응사격을 하려고하니 프랑스는 저지대에서 포격이 불가능한다.

 

그리고 포병대장은 멘탈이 나가고 권총자살한다.

 

 

본격적인 폭우 시즌이 시작되면서 보급이 끊기게 되고

 

보급보다도 장대비는 오지만 마실물이 없어지고 위생적으로 급격한 고통에 시달린다.

 

장티푸스, 이질, 말라리아 등 질병이 퍼진다. 물천지인데 마실 물이 없고 모기는 창궐한다.

 

 

마침내  5월 7일 8천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견디다 못해 항복을 한다.

 

 

1954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리게 되고

 

내용은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모든 간섭과 개입을 그만두고 철수한다는 평화합의성명이다.

 

다만 미국이 크게 반발했는데, 공산사회주의 세력의 급격한 팽창을 우려했다.

 

 

첫번째로 미국은 1950~1953년까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명피해와 물자를 동원했으나

 

휴전이라는 어정쩡한 합의로 끝나버렸고 한국에서 실질적인 이득도 얻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분위기는 한국은 100년이 지나도 깡통차고 다닐 나라로 예상했다.)

 

 

 

두번째는 애치스 라인을 확보해서 태영퍙호수를 만들어 재해권을 확보하려면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아야만 한다.

 

애치스라인은 미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야욕을 저지 하기 위한 동북아 방위선이다.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라인 즉 "애치스 라인"으로 한다 였는데

 

여기서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빠져 버린다.

 

그리고 5개월 뒤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존나게 까인다.

 

 

세번째는 프랑스와 베트콩의 전쟁은 대리전이었다.

 

미국은 직접 개입하기 껄끄러우니 프랑스에게 전징비용을 대주고 무기와 탄약을 쥐여줘가면서 싸우게 독려했는데

 

전술한번 잘못 짜서 한방에 날라먹으니 미국입장에서는 열받는것이다.

 

 

당연히 미국이 이렇게 회담장에서 반발하니 분위기는 급랭했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은 베트콩을 잘못 판단했다. 처음에는 월맹군을 지원하면서 유럽의 식민지 정책을 견제할려고 했는데

 

호치민과 월맹이 알고보니 진성 빨갱이였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에 사로잡혀서 반쯤 미쳐돌아가는 상황이었고

 

미국 국민들은 빨갱이의 'ㅃ'만 나와도 친하게 지내던 옆집 스미스 아저씨를 빨갱이라고 신고 때리는 분위기였다.

 

 

 

존.R 매카시, 위스콘신주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이 분이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내가 그 명단을 갖고 있다." 라는 말을 날려서

 

각 정치, 사회계에서 들고 일어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그말에 책임 질 수 있냐? 증거 있냐? 라고 몰아 붙였을때

 

메카시는 "증거는있지만 일반에 공개하면 사회적인 파장이 너무 크니 비공개로 입증하겠다."

 

라고 엄청나게 까이고, 같은 공화당에서도 매카시를 비난하고 결국 정치생명은 끝나지만

 

2003년 기밀이 해제되면서 사실이었다는게 드러난다.

 

 

 

초대 FBI 국장 에드가 후버 -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다 질병이다."

 

매카시즘이 오늘날에는 안좋은 의미로 쓰지만, 그와 무관하게 미국에는 심각할 정도로

 

사회, 공산주의 움직임이 활동적으로 일어 났고, 길거리 선동꾼들과 데모꾼들이 조직되었다.

 

Communist Party USA라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빨갱이 정당이 설쳐대던 때다.

 

정확히는 Progressive Party (진보당)이기는 한데, 의미가 껄끄러우니 이름을 바꾼거다.

 

마치 한국에서도 노동당에서 진보당으로 이름을 바꾼것처럼 말이다.

 

 

 

 

1947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비에트 연방하고 완전히 선을 긋는 발언을 한다.

 

타협은 없다,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다. *닉슨 독트린 아니다.

 

이 말을 계기로 수십년간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계기이다.

 

 

베트남 이야기하다가 좀 많이 샛길로 샜는데 다시 돌아가보자

 

제네바 협상에서 "2년뒤인 1956년 6월까지 남 북 총선거해서 단일 베트남 정부 수립하고 우리는 그거보고 철수"

 

라는 합의를 하게 되는데, 프랑스가 뻘짓거리를 하고, 미국이 뒷처리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양상을 띄었다.

 

당연히 베트남에서 총선은 호치민의 압승이 예상되고 실제로 호치민이 압승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도미노는 사실화가 되었으며, 공산주의의 팽창은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애매하게 무승부로 끝나버린 미국은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팽창은 적극적으로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가졌으며

 

 

남베트남에 친미반공정부 수립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베트남에는 왕조가 아직 있기는 했는데 프랑스가 얼굴마담으로 세워둔거라 집어치우고

 

 

응오딘지엠(고딘디엠)이라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를 밀어주게 된다.

 

1955년 10월 26일, 반공주의를 주장하며 남북총선에 엿을 먹이며, 남베트남 단독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취임을 하게 되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베트남이 확립되는 순간이다.

 

 

사실 이는 호치민에게도 상당히 난감한 사건이다. 프랑스와 싸운다고 상당히 국력을 소모하였으며

 

전쟁의 피로는 남아 있는데, 아직 정치체계나 사회질서도 잡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이랑 마오쩌둥은 연락도 안된다.

 

오히려 남베트남과 미국이 올라오면 못버티는 상황이 된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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