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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에세이

베트남 전쟁과 근현대사를 알아보자 3편 - 외전 한국군

by 소수의견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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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을 설명하는 김에, 한국이 왜 참전했는지 과정도 같이 들어간다.

사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과정을 잘 모르지, 전쟁을 하고 미군이 철수하고, 공산화 된거는 다들 알거니 말이다.

 

 

 

"청년과 여성이 도시에서 정치적, 군사적 투쟁의 주요세력이므로 우리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 그들을 고무하여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인민을 동원하여 조직화해 가려면 우리는 다수의 잠정적 조직을 편성하고

 

우리가 투쟁에서 내건 슬로건을 일반 민중이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우리의 핵심 조직이 공작활동을 성공리에 전개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감추는데 있다."

 

 

북베트남 노동당 제1서기 레 두안(Le Duan)이 1966년 사이공 시당위원회에 보낸 지시

 

 

 

 

8월 5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 해군기지에 즉각적인 보복포격을 하도록 지시했고

 

의회에 통킹만 결의안을 제출한다.

 

미국여론은 대통령의 조치를 적극지지하였고, 의회역시 "필요한 모든 대책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

 

하는 통킹만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하지만 존슨 대통령은 백악관 성명을 통해

 

'이 공격은 북베트남의 도발을 응징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 이상 확전 의사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중국과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제스쳐였고, 만일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다면

 

중국은 당장이라도 개입할 의사가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퐁항에는 제3국의 선박으로 위장한 소련, 중국국적의 선박이 기항중이었고

 

때문에 미국이 대놓고 덥석 전쟁에 뛰어들기엔 꺼림직한 것들이 많았다.

 

일단 린든 존슨은 존 F. 케네디의 암살 직후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부통령이었고,

 

 

대통령선거가 몇달 남지 않았던 것이 여론을 의식해야하는 존슨을 잠깐동안 신중론자로 만들었던것이다.

 

게다가 베트남은 미 본토에서 16,000km 나 떨어져 있었기에 당장 전면전을 시작하기엔 보급에 지장이 있었다.

 

이것 말고도 고민은 끝도 없었는데

 

미 의회에서 발표하길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진영을 지키고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

 

파병한다고 대의명분을 주장했지만

 

막상 세계평화를 위해 미군만 달랑 나온 것이다.

 

1964년 5월 9일, 존슨대통령이 세계 25개국에 남베트남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하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한국전쟁때와는 달리 냉담했다.

 

UN결의를 통한 파병도 아니었고, 불과 몇년전 한국전쟁에 파병했더니 상처뿐인 영광이라 

 

미국이 또 전쟁한다고 파병해라 마라 하는것도 짜증이 난것이다.

 

GPR(미국 전략적 재배치)으로 인한 유럽의 공백도 있었다.

 

1961년 미사일 사태가 마무리되고 베를린 사태가 터진다. 소련을 주축으로 한 뱌르샤바 동맹의 군대들이 베를린~프랑크푸르트 까지 이어지는 경계선 근처에 대규모 기갑훈련(침공훈련)을 실시했다.

그에 따라 미국도 3군을 중심으로 펄다라는 평원을 거점으로 삼아 소련 대규모 기갑부대를 방어하는 작전을 실시한다. 

그 때 지휘했던 장군이 MACV 3대 사령관이 되는 에이브람스 장군]

 

미 3군을 주축으로한 NATO군도 똑같이 경계선에서 훈련을 실시했으며 다행히 소련도 이에 위협을 느껴 철수하고 맘

그 이후로 NATO 가입국들이 미국에게 땡강 부리기 시작하는데 "소련이 또 언제 저런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1.유럽에 주둔하는 미군의 수를 늘려달라

2.전술핵 배치갯수를 늘려달라

 

특히 당시 국방장관 맥나마라였는데 본업이 전문 경영인이라 포드 자동차 CEO에 있을때부터 효율성을 강조했는데

이 효율성을 군대에도 적용시켰다. 즉 주어진 예산에 맞게 효율성을 딱딱 맞게 배치하는건데 

NATO에 의견에 따르면 소련 침공에 대비해 미군을 재배치하면 대규모로 배치해야 하는데 이는 너무 편중적이므로 

군사를 재배치하면 효율성에 어긋나므로 문제가 생김 그래서 맥나마라가 

"주독 미군사령부의 기갑 사단의 증강과 장비를 지원해줄테니 NATO국들이 처리한다"라고 합의를 본덕에

베트남전쟁때도 함부로 참전할수 없었다.

유럽의 공백이 오면 소련에게는 침공하기 최적의 조건이였다.

 
 
사실 이것만해도 글을 따로 쓸 수 있을정도로 방대해서 여기서 줄이고 나중에 쓰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베트남전에 참전국중 두번째 파병규모가 우리나라였다.

 

태국을 제외한 뉴질랜드, 대만, 스페인, 호주군을 다합쳐도 대략 8000명이 전부였으니 뭐 말그대로 모양내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입장이 많이 달랐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려준 미국인데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주한미군으로 보호 받는 입장이라 거부하기힘들 었다.

 

사실 파병의 배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첫째는 한국나 미국이나 돈문제였다.

 

 

 

아래에서 나오는 돈문제와 착각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원조자금의 문제라고 하겠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로 냉전체제에 접어들면서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게 무상으로 돈을 뿌리는데

 

냉전이 장기화되면서 미국도 부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조비용을 점차 삭감을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게 직격탄으로 돌아온다. 아직 한국은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서 생산시설조차 없었고

 

대부분의 소비재들은 수입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보리나 옥수수같이 농작물 역시 수입에 의존했어야 할정도로 비곤했다.

 

 

 

김일성이가 선전한데로 남조선애들은 다리밑에 살면서 깡톤찬다는게 거짓말은 아니다. 아니 진짜였다.

 

 

두번째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 전대통령이 1961년 5월 16일 대한민국의 정권을 잡게 되는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지는 점점 약해지는 상황이다. 거기에다가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시위가 이어졌고

 

정권초창기에 애를 엄청나게 먹었다. 민간으로 이양한다고 했다가 결국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 한일청구권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유무상 원조와 차관을 빌리게 되는데 이는 6.3굴욕 외교로 비추어지며 전국으로 반대시위가 확산된다.

 

사진은 당시 시위하다가 체포된 이명박 전 대통령 모습

 

아무튼 돈문제와 정치적인 기반의 문제

 

 

 

그리고 경제발전에 꼭 필요한 외자도입 문제였다.

 

원조금과는 별도로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금액이 필요한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은 남는게 파병뿐이었다.

 

그리고 이 파병하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군수품과 일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실제로 UN보고서에 따르면 수출액은 참전 1년후 전과 비교해서 630만달러의 4배를 돌파하게 된다.

 

 

이대로 쭉 탄력을 받아서 1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수배나 성장하게 된다.

 

아무튼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서

 

1964년 9월 22일 의료인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10명으로 이루어진 한국 군사 원조단이 베트남땅을 밟게 된다.

 

제1이동외과병원이라고 명명된 이들은 베트남에서 각종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게 되는데 엄밀히 말하면 '파병'은 아니다.

 

같은해 12월 18일, 브라운 주한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여 정식으로 파병해줄것을 요청하고

 

이듬해 1월 월남정부도 추가적인 지원을 바란다는 서한을 보낸다.

 

 

 

1965년 2월 건설(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를 월남에 보내게 되고

 

이는 대한민국이 헌법수립 이후 최초의 해외 파병으로 기론된다.

 

 

비둘기부대는 육군준장 조문환 장군과, 1개 공병대대, 1개 경비대대, 1개 수송중대, 그리고 1개의 해병공병중대로 

 

그 인원은 약 2000명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 건설지원부대가 가는데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시아공(지금의 호치민)의 20km 북쪽에 위치한 디안에 본부를 잡고

 

 

 

도로건설과 학교, 다리, 집등을 지어주며 현지인과 잘 지내고 있다.

 

그치만 베트콩 입장에서는 건설지원단이든 뭐든 베트남땅을 밟은 침략세력이라 규정하고

 

파병 불과 한달여가 지난 4월 3일 베트콩은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에 야습을 감행했지만

 

경비중대에 퇴치 당한다.

 

이후 베트콩 출몰이 잦아지자 주변 수색정찰을 실시했는데 8일뒤인 11일, 

 

 

수색하던 경비5중대가 베트콩을 만나서 격파해버리고 물자까지 노획해서 돌아온다.  ?

*심지어 경비대는 부상1명 끝

 

경비하라고 보냈는데, 베트콩과 싸워서 전과를 올리는 것을 본 미국은 한국의 전투부대를 파병할 것을 요청한다.

 

 

5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군원이관 재검토 및 베트남 파병기간동안 군원이관 중지

 

*군원이관은 군사원조를 이관한다는건데 원조규모를 삭감하기 위해 원화로 살수 있는 물자는 앞으로 알아서 돈으로 사다쓰라는 것이다. 이것이 금지되었으니 미국돈을 마음껏 쓸 수 있다.

 

북한 재침시 즉각적인 미군개입 및 지원

 

한국군 유지를 위한 군사지원

 

차관 1억 5천만불 제공 (이 돈으로 SOC사업 투자한다.)

 

한국상품 대미수출 확대

 

KIST 설치를 위한 지원 (지금의 카이스트 KAIST)

 

베트남 군수물자 구매국에 한국 포함 (이게 제일 ㅆㅅㅌㅊ 부분이다)

 

상당히 우리로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3월 체결된 소위 '브라운 각서'에 따라 전투부대를 증파하겠다고 했지만

 

당시 여-야의 파병반대 여론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들끓었다. '청부전쟁반대', '용병파병반대'

 

 

박정희 왼쪽이 정구영 의장서리

 

공화당의 의장서리였던 정구영은 '월남의 민족해방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같으며,

 

전쟁으로 더러운 돈을 버느니 가난하게 살자'며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차지철도 반대운동을 벌이기는 하는데, 미국과 협상할때 몸값 높이기 용이었다.

 

신민당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파병반대 데모를 주도했고, 민중당의원들은 일괄 사퇴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이런 국내의 혼란스런 정국이 오히려 미국에게는 우리가 더욱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어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않으면 한국내 주둔하는 미군을 베트남으로 옮기겠다고 협박했지만

 

미국내의 여론과 중-소 의 눈치를 봐야하는 미국입장으로서는 사실 현실화 하기 힘든 뻥카였다.

 

결국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은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8월 13일 국회본회의를 통과하게 된다

 

 

같은해 9월 육군의 채명신 소장이 파월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며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육군의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첫 전투파병부대로 결정되어 파병을 준비하였고

 

 

10월 12일에는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파월 환승식이 거행된다.

 

이렇게 한국군은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부산항 제3부두 환승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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