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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에세이

베트남 전쟁과 근현대사를 알아보자 2편

by 소수의견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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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은 2편이다. 1편에서는 인도차이나 식민지 - 인도 차이나 전쟁 - 북베트남 남베트남 수립까지 다루어 보았는데, 이제 베트남 전쟁을 적어볼 차례이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반공 정부를 세우고 베트남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선포하고 지원해준다.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던 디엔비엔푸 전투 까지는 강대국의 제국, 패권주의 vs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양상이었지만

 

미국의 개입 이후, 공산주의 vs 자유주의의 대결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처음에는 남베트남은 강력한 미국의 지원을 입으며 상당히 선전하게 되는데

 

미국이 원하는데로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호치민을 외친 덕분이기도 하다.

 

1956년 남북총선도 거부하고 독자적인 베트남 정부수립을 하게 된것도 이런 반공정신 덕분이었으니

 

 

뭐 늘 그럿듯이 문제는 다른데서 터진다.

 

응오딘지엠 정권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때문이다.

 

어찌보면 식민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정권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미국이 생각한 만큼 남베트남의 국민들은 성숙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단 독재라고 불린 기간만큼 긴 시간을 통치하지도 아니고 모양 자체는 정식 의회를 가진 합법정부 아래에서 남베트남 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응오딘지엠도 병신이었지만, 더 문제는 같이 가야하는 지방호족들이다.

 

우리야 중앙집권이 익숙하지만, 동남아는 아직도 지방호족이 유효하고, 득세하는게 현실이다.

 

한가지 예로 들자면 필리핀에서 2009년 민다나오의 마긴다나오주(州)에서 선거기간에 시장 후보와 기자단을 싹쓸이해서 처형한 근대사에 유래없는 일이 있었다.

 

호족 명문가인 안달 암파투안이 대대로 해처먹고있었는데 자기 밑에 일하던 놈이 선거에 출마하려고 하니까

 

자기 사병(私兵)들 시켜서 기자단하고 시찰중이던 시장후보를 모조리 처형시켜버린 사건이다.

 

전세계적인 여론이 크게 들끓었지만 아로요 가문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지지호족세력이라 나중에 유야무야 끝이 나버린다

 

(필리핀은 아로요 VS 아키노 가문이 대통령을 서로 배출하는 혈통세력임)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응오딘지엠이 실정(失政)을 하게 된 이유에 디엠본인이 병신인 이유도 있지만 이 지방호족들이 크게 관여돼

 

남베트남의 호족세력들은 그전에는 누리보지 못한 경제적 풍요와 막강한 권력이 한순간에 쥐어졌어

 

미국덕분이 말이다.

 

그것도 빨갱이OUT만 외치면 미국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퍼주었다.

 

 

이렇게 빈부격차는 늘어가고 권력은 편향되어지고, 남베트남내의 사회불만세력이 점점커지면서

 

북베트남이 본격적으로 침투를 하게 된다.

 

월맹의 지원을 받는 산하 단체들이 지들끼리 국가에 준하는 행정체제를 구축해버리며

 

그중 가장 큰게 종교단체였는데 이는 불교와 천주교 양쪽에 큰 세력으로 자리잡아 민중들의 선동에 앞장선다.

 

(나중에 통일 후 1순위로 숙청되지만 여기선 넘어가자)

 

 

 

남베트남의 사이공시를 호찌민시로 이름을 바꿔버린다.

 

 

 

아무튼 자경단 비스무리한 조직을 만들게 되고 시민군으로 발전하면서 정부군에 무력으로 대항하다가

 

나중에는 베트콩으로 편입이 된다.

 

1960년 12월 20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지엠 반대세력들이 민족해방전선 (NLF : Nation Liberation Front)을 결성한다.

 

 

 

분신하는 승려, 어디서 많이 본사진일건데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한사람의 분신자살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인지 상상도 못했다.

 

 

일단 지엠대통령은 카톨릭 신자였고, 최측근은 대통령의 제수씨였던 마담 누였다.

 

 

 

 

본명은 트랑 르 수안인데, 지엠대통령 동생인 응오딘누의 와이프였다.

 

지엠은 정부 요직의 관료를 가족으로 채웠는데 (가족 국가경영?)

 

동생 응오딘누는 내무장관, 마담누의 아빠는 미국대사, 엄마는 베트남유엔대표, 마담누의 삼촌들은 각료로 임명

 

그리고 지엠은 미혼이라 마담누는 영부인의 자격으로 대통령궁에서 살게된다.

 

그리고 디엠과 마담 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나중에 적음)

 

디엠이 마담 누를 전혀 통제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마담누는 사실 머리가 텅비어서 아는것도 없고 비싼돈들여서 파티하는거 말고는 관심도 없고

 

법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이혼, 간통, 피임, 음주, 춤, 무당 노름을 법을 금지시켜버린다.

 

그리고 마담누도 가톨릭 신자였는데, 위에 분신한 틱광둑스님이 분신하게된 계기가 마담누에서 비롯된다.

 

 

1963년 지엠은 뭔 이야기를 마담누랑 나누었는지, 베트남 내의 모든 불교 사찰 문을 닫아버리는 법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같은해 5월 석가탄실에 불교 행사를 금지한다.

 

 

 

당시 종교의 75%가 불교신자인데?

 

당연히 시위가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버린다.

 

 

 

종교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는 승려가 목숨을 불사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어쩌면 그냥 극렬분자의 분신자살정도로 끝날 일에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의 물꼬를 터준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마담 누다.

 

콜린스 미국 대사가 마담누를 정치에서 좀 물러나게 하라고 지엠 대통령한테 몇번 얘기를 할 정도였는데.

 

마담 누는 이 틱광둑 분신사건에 대해서 정말 해서는 안될 말을 한다.

 

"어머 라이브로 바베큐 되는 중 또 나타나면 이번엔 나 꼭가서 구경해야징ㅋㅋㅋㅋ"이런 어이없는 멘트를 날린다.

 

만약에 전태일이 분신했는데 거기다 대고 권력 핵심에 있는 사람이

 

'씨발 노비새끼 존나 잘타네 네 엌ㅋㅋㅋㅋ'  이런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는 돌이킬수 없는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이후 6명의 승려가 분신을 하게 되고 종교탄압과, 지하에서 세를 키우던 사회주의 사력과 맛물려서 점점 혼돈으로 가는데

 

놀랍게도 디엠은 더큰 일을 저지른다.

 

1963년 8월 이성을 잃어버린 디엠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절에다가 군부대를 투입해서 1,400명의 승려를 사찰폐지법? 위반으로 체포한다.

 

 

 

이날 저녁 인터뷰에서 "이때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라고 끝없는 망언제조를 하고 있다.

 

 

결국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 종교탄압에 대한 불만을 그냥 놓칠 호치민이 아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미국은 같은해

 

8월 지엠을 지지했던 놀팅 대사를 소환하고 헨리 캐봇 로지 대사를 급파

 

로지는 시급히 남베트남의 상황을 파악한뒤 워싱턴에 1급기밀문서를 타전한다.

 

'지엠정부는 이미 절망적 상태이며 대다수의 남베트남 국민들이 호치민 세력에 의해 선동되고 있다'는 내용

 

결국 1963년 11월 1일 남베트남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된다.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동생 응오딘누는 쿠데타를 일으킨 두옹반민 세력에 의해서 처참하게 처형된다.

 

근데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 마담누는 미국에있어서 화를 면했고, 베트남이 저렇게 되자 이탈리아로 망명을한다.

 

?????

 

 

어쨋거나 사실 미국은 반공세력의 확장만 막으면 됬기에 다른 정권이 들어서도 반공만 지켜준다면 상관이 없었지만

 

새로 들어온 정권은 NLF(남베트남해방전선)에 우호적이었다.

 

결국 미국은 믿을새끼 하나도 없구나 하고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한다.

 

즉각 본격개입을 시작해서 1962년 남베트남 군사원조 사령부 (MAC-V :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를 설치하고 준 전시상태에 돌입

 

결국 직접 나서서 한판 떠야 결말이 나겠다는 결론을 내린것이다.

 

그렇게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남 북의 대립과 긴장은 높아져가다가

 

 

결국.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게된다

 

 

아래는 엔하위키 출처

 

 

1964.8.2.

통킹만 공해상에서 정찰임무(코드명 DESOTO Patrols; 북베트남의 해안레이더를 가동시켜 레이더망을 파악하려던 작전)중이던 미 구축함 매덕스(Maddox)호를 향해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했으나, 매덕스호는 어뢰공격은 피하고 기관총 공격에 의한 아주 경미한 손상을 입었음

 

 

1964.8.3.

미 국무성은 북베트남에 강력히 항의하며 더 이상 도발할 경우 중대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

 

 

1964.8.4.

터너 조이(C. Turner Joy)호와 함께 다시 정찰임무에 나선 매독스호는 북베트남으로부터 공격의 전조로 추정되는 레이더 시그널을 받고 있었고,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소나 담당병사가 자신의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북베트남의 어뢰공격으로 착각하여 어뢰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함. 나중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그날 밤 북베트남의 공격이 실제론 없었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 당시 미군 당국과 함정의 승무원들은 공격이 있었다고 확신했음. 

 

 

 

즉, 미국이 전쟁을 촉발하기 위해서 허위보고 한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미 의회는 베트남 전쟁을 승인하고

 

 

 

1968년 8월 5일 미항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호와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호에서 함재기들이 발진하여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를 폭격하며 베트남전쟁이 개전하게 돼

 

이렇게 베트남 전쟁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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