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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에세이

현대사회에서 경찰이 사라진다면? - 머레이 힐 폭동 사건

by 소수의견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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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안을 유지할 군경의 역할은 몹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 특히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치안이 안정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치안유지 잘 되는게 너무 당연하다 보니 경찰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실감이 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충 사회가 불안해지고 살인, 절도, 강간 등 끔찍한 범죄가 원래보다 더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 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만요.

 

그런데, 캐나다에서 이 '현대 사회에서의 치안 공백' 상황이 한번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머레이 힐 폭동(Murray-hill riot)' 이라고 부르지만, 사건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몬트리올 공포의 밤(Montreal's night of terror)' 이라고도 부르는 사건이 그것입니다. 

 

 



1969년, 퀘벡 주 몬트리올 시의 경찰들은 인내심이 한계치까지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퀘벡 주는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1960년대 내내 영어를 쓰는 캐나다인과 프랑스어를 쓰는 캐나다인 사이에서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퀘벡 분리주의자들이 폭탄을 설치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당연히 이런 사건이 터지면 터질수록 경찰들의 업무는 위험하고 힘들어져만 갔지요.

 

급기야는 1968년 프랑스어 시위대와 영어 시위대가 충돌하는 걸 진압하다가 경찰 2명이 사망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이런 극한의 노동 환경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토론토의 경찰들이 퀘벡 주의 경찰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아가는 걸 본 퀘벡 경찰들은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단순히 경찰들만의 분노는 아니었던 것이, 당시 몬트리올 시장이었던 장 드래푸가 민생 안정보다는 무리한 엑스포 유치에 보다 힘쓰면서 몬트리올 시민 대다수가 불만에 가득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일 불만이 컸던 게 경찰이긴 했지만요. 

 

장 드래푸의 모습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한 몬트리올 경찰이 1967년 10월 17일 오전 8시에 업무를 거부하고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일시적으로 몬트리올은 치안 공백 상황이 됩니다. 이후 얼마 안 되어 치안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군대와 기마경찰을 파견하면서 상황이 종료됩니다만, 24시간도 채 되지 않는 16시간 동안의 치안 공백 상황 동안 벌어진 혼란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오전 11시 20분에 처음 벌어진 은행 강도 사건을 시발점으로 은행 9곳에 강도가 쳐들어왔고, 방화 사건 12건에 100곳이 넘는 상점이 약탈당했습니다. 자잘한 절도까지 포함하면 16시간 동안 발생한 도둑질은 400건이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치안이 사라진 16시간 동안 총 300만 달러 가량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캐나다는 개발도상국도 아니고 엄연히 선진국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약탈 행위가 벌어진 것입니다. 

 

물론 7억불 이상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 90년대의 LA 흑인폭동 같은 사건도 많기 때문에 얼핏 보면 별 거 아니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머레이 힐 폭동 사건이 유독 치안공백의 예시로 주목받는 것은 LA 흑인폭동같은 약탈이 동반된 치안 공백 사태의 초창기 사례이며, 치안 공백 상황이 매우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극심한 혼란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현대사회에서 정부와 치안을 유지할 경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설명할 때에 항상 언급되곤 합니다. 

 

 

 

참고로 사건의 이름에 붙어있는 '머레이 힐'은 지명이 아니고 회사 이름입니다. 몬트리올의 Dorval 국제공항을 머레이 힐이라는 리무진 업체가 독점하자 택시 운전사들이 경찰의 파업과 같은 날에 시위를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사건에 저 회사 이름이 붙은 겁니다. 참고로 택시 운전사들은 이때 머레이 힐의 주차장에 불을 지르고 경찰 한 명을 총으로 쏴죽였습니다. 사건 이름에는 택시 운전사들 관련된 게 붙어 있는데 정작 사건 자체는 택시 운전사들 시위보다는 경찰들 시위로 인한 치안 공백으로 더 유명하니 좀 아이러니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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